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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i sinon personne" (너가 아니라면 아무도 안돼)




어제 (2018년1월7일),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영원한 아이돌'이라고 불리었던 조니 할리데이 Johnny Hallyday에 이어 또 다른 시대의 아이콘을 떠나보내야 했다. 바로 6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프랑스 대표 여가수 France Gall 프랑스 갈 (본명 Isabelle Gall) 이다. 




1947년생인 프랑스 갈은 에디 피아프나 아즈나부의 작곡가였던 아버지가 일찍이 재능을 알아본 덕에 1963년, 16살에 데뷔를 하게되었다. 그 당시에는 TV로만 데뷔를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프랑스 갈은 처음에 소규모 콘서트 등으로 시작했고, 점차 유명해 지면서 라디오나 TV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프랑스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Sacré Charlemagne" 라는 곡을 통해서 였다. 이 곡으로 이름을 알린 프랑스 갈은 그 이후 제 10회 Eurovision 유로비전에서 룩셈부르크를 대표하는 가수로 선정되었다. 유로비전은 현재도 1년에 한번 진행되는 유럽의 행사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나와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신곡으로 노래를 하고 우승자를 가리는 대회인데, 프랑스 갈은 그 당시, 프랑스인이지만 룩셈부르크를 대표하며 세르쥬 갱스부르 Serge Gainsbourg가 작곡한 곡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 을 불러 우승을 하게 되었다. 






▲유로비전 우승곡인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

갱스부르가 작곡하였고 프랑스 갈이 불러 프랑스 대표로 제 10회 유로비전에서 우승하게 된다.




유로비전 후, 유명하고 실력있는 작곡가이자 가수인 갱스부르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며 만족감을 표했던 프랑스 갈이지만, 갱스부르의 짖궂음(or못됨)이 어디 갈까. 프랑스 갈과의 다음 콜라보레이션에서 갱스부르는 프랑스 갈에게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곡들을 써주고, 그 당시 19살에 불과했던 프랑스 갈은 노래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를 모른채 녹음과 첫 방송을 마치게 된다. 첫 발표 이후 스캔들 급의 엄청난 반응들이 쏟아졌고, 프랑스 갈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나서야 자신이 부른 노래에 담긴 성적인 의미를 알게되었다. 그 당시 갱스부르가 프랑스 갈에게 써줬던 곡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Les Sucettes". Une sucette 이란 막대사탕과 같은 것을 이르는 단어인데, 프랑스 갈은 한 소녀가 막대사탕을 사먹는 순수한 내용의 스토리로만 이해했지만, 갱스부르는 성적인 행위를 암시하는 의도로 이 곡을 썼다. 







▲프랑스 갈에게 노래가 담고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갱스부르의 능글맞은 질문과 

순진한 프랑스 갈의 답변이 담긴 비디오는 아직도 이 둘을 언급할 때 꼭 나오는 매우 유명한 영상이다. 

위 영상에서는 1분 40초 경에 해당 질문과 답변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갱스부르가 Les sucettes 노래의 내용을 설명해 보라고 하자, 

프랑스 갈은 한 소녀가 드럭스토어에서 얼마 안되는 돈으로 막대사탕을 사먹는 내용이라고 답하고,

"이 내용이 다에요. 아닌가요...?" 라고 되묻자, 

갱스부르는 "응, 맞아"라고 답한다. 





후에 프랑스 갈은 이 때의 사건이 매우 모욕적이면서 배신감을 많이 느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갱스부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곡을 그 당시 연인이었던 제인 버킨 Jane Birkin (버킨 백의 주인공)의 앨범에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프랑스 갈의 커리어는 1973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 작사가였던 Michel Berger 미쉘 베르제를 만나면서 커리어에서도, 인생에서도 전환점을 가지게 된다. 그 전에도 성공한 가수였지만, 음악적으로 영양가 없는 노래를 불렀던 프랑스 갈에게 미쉘 베르제는 명곡들을 써주면서 프랑스 갈을 가수로서 한 단계, 아니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게 된다. 알려진 얘기로는 우연히 만난 미쉘 베르제에게 프랑스 갈이 다음에 녹음할 곡들을 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이돌 같은 스타 프랑스 갈에게 주어진 곡이 '뮤지션'이었던 미쉘 베르제가 보기에 형편 없었다. 프랑스 갈은 그에게 곡을 부탁했지만, 미쉘 베르제로서는 프랑스 갈과 같은 스타일의 가수와의 협업이 싫어 계속 거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프랑스 갈이 그의 앨범에 작게나마 피쳐링 격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미쉘 베르제가 프랑스 갈을 위한 곡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74년, la déclaration d'amour 가 시작이었는데, 노래 제목이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커플로 발전한 동갑내기 뮤지션과 가수는 1976년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미쉘 베르제가 쓴 이 'La déclaration' 곡과 함께 프랑스 갈은 처음으로 정식 앨범을 내게 되었고,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 이전의 프랑스 갈을 지워버리는 커리어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에도 미쉘 베르제는 프랑스 갈을 위한 많은 곡들을 썼고, 듀오로 참여한 곡들도 있는데, 미쉘 베르제 작사작곡 + 프랑스 갈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노래 중 명곡이 된 노래들을 꼽아본다.  





 - 1974년 La déclaration (d'amour) 






미쉘 베르제 Michel Berger가 프랑스 갈 France Gall을 위해 처음 작곡한 곡이자, 미쉘 베르제가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프랑스 갈의 앨범에 실리게 되는 곡이다. 




- 1976년 ça balance pas mal à Paris





둘이 결혼한 그 해, 그 달인 1976년 6월에 발표한 노래이다. 미쉘 베르제의 곡위에 입혀진 둘의 목소리가 잘 어울러지는 곡이다. 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의 모습을 담고있는 영상 중에 하나다. 




- 1977년 Si maman si






그 전에는 밝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프랑스 갈이었는데, 이 곡에서는 그의 청아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슬픈 곡에도 잘 어울림을 보여준다. 프랑스 갈은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일찍이 성공을 맛 본 가수였는데, '스타'라는 화려한 사회적 위치와는 달리, 개인적으로는 조용하고 정적이지만 의미있는 삶을 원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의 슬픔을 표현한 곡인데, 아마도 프랑스 갈의 이러한 내적 갈등을 알았던 미쉘 베르제가 그러한 감정들을 잘 담아 그려낸 곡이 아닐까 싶다. 




- 1979년 Viens, je t'emmène






- 1980년 Il jouait du piano debout






엄청난 성공을 거둔 곡 중 하나로, 미쉘 베르제가 Jerry Lee Lewis 라는 미국 피아니스트이자 가수에게 오마주로 작곡작사한 곡이다. 노래 제목처럼 서서 피아노를 치던 그를 위한 곡이라고. 이 곡을 듣고 엘튼 존이 프랑스 갈과의 협업을 통해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 흔히 엘튼 존이 이 곡에 영감을 주었다고 잘못 알려졌는데, 그 반대로 미쉘 베르제가 이 당시 나온 엘튼 존의 노래에 영감을 준 것이라고 한다




- 1981년 Résiste







- 1984년 Débranche






- 1987년 Evidemment 





가장 아름다운 곡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노래인데, 그 당시 유명한 (물론 지금도 유명한) 프랑스 가수이자 이 커플의 가까운 친구였던 Daniel Balavoine 가 헬리콥터 사고로 일찍이 운명을 달리한 후 그를 위해 썼다고 알려져있다. 곡도 가사도 프랑스 갈의 목소리도 아름다운 곡! 




-1987년 Ella, Elle l'a






이 곡은 미쉘 베르제가 동경하던 Ella Fitzgerald라는 미국 재즈 가수에 대한 오마주로 쓴 곡이다. 원래는 70년대에 다른 제목으로 썼던 곡인데, 그 당시 다른 문제로 발표하지 못했고, 십여년이 지난 후에 프랑스 갈의 앨범을 제작하는 중 제목을 바꿔 발표하게 된 곡이라고 한다. 






미쉘 베르제는 생전 프랑스 갈을 위한 곡/앨범 하나, 자신을 위한 곡/앨범 하나를 한해씩 번갈아 제작하며 활동했다 (훗날 이 이유는 아픈 딸을 돌보면서 서로의 활동을 균형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본인 스스로의 명곡도 많지만, 프랑스 갈의 커리어를 전환시켜준 음악적 은인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미쉘 베르제. 바람 잘 날 없는 연예계에서 서로를 위한 굳건한 사랑을 보여주고, 음악적으로도 그 누구 못지 않게 교류를 나누던 두 사람이지만, 1992년 미쉘 베르제가 테니스 경기 도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그 이후에 프랑스 갈도 활동을 줄이게 된다. 음악적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인생의 사랑이었던 미쉘 베르제의 죽음으로 인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의 죽음 이후 프랑스 갈 또한 혈액암으로 투병했고, 미쉘 베르제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이인 딸은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던 '낭포성 섬유증'이라는 병으로 1997년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면서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던 탓이기도 했다. 사실 미쉘 베르제의 죽음 직후에는 그의 죽음을 잊기 위해 음악 활동을 이어갔지만, 딸의 죽음이후에는 이러한 음악 활동도 프랑스 갈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갈은 미쉘 베르제와 아프리카의 발전을 위한 인도주의적 활동에 힘써왔는데, 남편과 딸의 죽음 이후 주로 세네갈에 있는 자택에 머물며 미디어와 가수의 삶과 거리를 두며 지내왔다. 두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 무대에서 숨어버린 프랑스 갈은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 인터뷰 등에서, 이 두 사람의 죽음 이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가수로서의 커리어가 아닌 '평온함' 뿐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언제 활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냐는 질문이 가장 듣기 끔찍하다고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활동하며 성공했지만, 갱스부르를 비롯한 많은 사건들을 겪기도 했고, 그 만큼 미디어에 시달렸던 만큼 더이상 가수로서의 활동에 미련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미쉘 베르제 만한 음악적 반려자를 찾기가 불가능 했기도 했고 말이다. 




 (출처 Le Figaro)




이렇게만 보면, 가수라는 화려한 직업에 맞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었을 것 같지만, 활발한 인도주의 활동 등에서 보듯이 외유내강으로 굉장히 결단력있고 활동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쉘 베르제의 경우 음악만 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는데, 집의 대소사, 심지어 소소하게 가전제품을 연결하거나 하는 것 모두는 프랑스 갈이 책임졌다고. 



미쉘 베르제를 만난 후 자신을 위한 곡을 요청할 당시, 프랑스 갈은 제작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Ce sera lui ou ce sera personne" (그가 하지 않는다면, 아무와도 하지 않겠다)

 운명적으로 음악과 인생의 반려자를 알아본 것일까. '그가 아니면 안된다'라던 프랑스 갈은 실제로 미쉘 베르제와 인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했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을 지켜왔다. 



그들의 가까웠던 친구 Daniel Balavoine 다니엘 발라부안이 사망하고 얼마 후 또 다른 가까운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미쉘 베르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일찍이 운명을 달리하는 것은 아닌지 괴로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때이른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것은, 그가 사랑하는 아내 프랑스 갈이었다. 두 친구 뿐 아니라, 남편과 딸의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었으니. 



그래서인지, 프랑스 갈은 언젠가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고 판단한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음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돈, 명예, 사랑, 등을) 모두 가졌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라며 속내를 고백하기도 했다. (실제로 베르제-갈 부부는 딸이 아픈 사실이나 가족사등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었다) 



가수로서의 성공과 행복만큼 개인사에서 불행도 많았던 프랑스 갈. 오랜 투병과 굴곡 많았던 삶을 뒤로하고 남편과 딸의 곁에 평온하게 잠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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